1.백두대간의 부활
한반도의 등뼈를 이루는 이 산줄기를 백두대간이라 한다.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에 이르는 1,400km의 산줄기가 바로 백두대간이다.
우리나라 땅을 동과 서로 나누면서 많은 골과 들을 낳고 민족의 삼터를 이룬다.
백두대간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우리 민족이 자연스레 터득한 지리관의 총화이다.
일제침략시대를 거치면서 왜곡되고 잊혀져 왔던 백두대간이
대학산악회를 중심으로 부활되기 시작하여 산악인, 환경운동단체, 일부 시민단체로
확장되어 오다가, 이제 정부에서 민족정기 회복사업의 하나로 국토종합개발계획에도
포함시킬 예정으로 있다.
1980년 겨울, 고지도 연구가 이우형씨는 인사동 고서점에서 우연히 조선조 영조때
실학자였던 여암 신경준(1712-1781)이 쓴 '산경표'라는 허름한 책을 발견했다.
대동여지도 복간을 준비하던 중 몇가지 의문에 고심했던 이씨에게 '산경표'는
문제를 푸는 열쇠와도 같았다
'산경표'는 여암이 정리한 우리나라 산의 족보, 즉 백두대간과
백두대간에 속한 산들의 위치에 대한 기록이었다.
'산은 강을 넘지 못하고 강은 산을 뚫지 못한다'는 백두대간의 거리개념은 여기서 나왔다.
백두대간 부활에 첫 시위를 당긴 이들은 산악인들이었다.
처음엔 대학 생들을 중심이었다. 그들은 사람의 흔적조차 지워져
가시덩쿨로 뒤덮힌 길을 헤치며 온몸으로 금을 그어 나갔다.
2.백두대간이란 무엇인가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비롯하여 지리산까지 우리 땅의 골간을 이루며
그 길이는 1,800km , 높이는 100미터에서 2,740m 까지 이룬다.
남한에서 종주할 수 있는 거리는 지리산에서 진부령까지 약670km이다
함경도 흥남과 비슷한 위도상의 마유령(972m) 북쪽은 모두 1천미터가 넘지만,
그 이남으로는 금강산(1,638m), 설악산(1,708m), 오대산(1,563m), 태백산(1,567m),
덕유산(1,614m), 지리산(1,915m) 만이 1,500m이상 높이를 간직하고 있다.
남북을 꿰뚫는 세로 산줄기인 까닭에 예로부터 개마고원, 영동과 영서, 영남과 호남을
가로막는 장벽이었으며 그런 만큼 황초령(1,200m), 추가령(586m), 대관령(832m) 등의
고개가 주요 교통로가 되어왔다.
이 땅의 모든 산줄기가 백두산과 통한다는 개념은 조선시대 이래 우리 민족의
자연 인식 체계를 이루는 주요한 틀이었다.
'택리지'의 이중환 과 '대동여지도'의 김정호, '성호사설'의 이익이 모두
여기에 기초하여 지도를 그리고 지리서를 썼다.
3.태백산맥은 일본 지질학자가 명명한 이름
현재 우리가 배우고 있는 산맥체계는
1903년 고토 분지로라는 일본인 지리학자가 제안한 지질학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에 대한 지질 및 광산조사에 혈안이 돼 있었다.
청일전쟁을 목적으로 우리나라를 교두보로 삼았고 특히 금에 관심이 많았다.
고토 분지로는 이 시기에 들어온 지리학자였다. 그는 교통사정이 열악했던
1900년대 단지 14개월 동안 국내 지질을 연구하고 돌아가 동경제국대학 논문집에
「조선의 산악론」과 「지질구조도」를 발표했다.
산맥 개념이 세워진 것도 이때부터다.
1904년에는 정치지리학을 전공한 일본인 야쓰쇼에이가 「한국지리」를 펴냈다.
그는 고토의 산맥지형도를 그대로 차용했다.
1905년 조선이 통감부체제로 들어가면서 교과서 내용에 제재를 받게 됐다.
1908년 지리교과서였던 「고등소학대한지지」에 야쓰쇼에이가 발표한 「한국지리」가 옮겨졌다.
산맥은 지질개념으로 지리를 연구한 한 개인의 연구결과에 불과하다.
백두대간이 단지 명칭상의 문제가 아닌 것도 이 때문이다.
백두대간 은 지형의 개념이고 태백산맥은 지질의 개념이다.
그러나 우리는 산맥 을 지형의 개념으로 지금껏 써오고 있다.
1906년 당시에도 정연호가 최신고등대한지지」를 통해 산경표나 대동여지도를 언급하며
대간과 정맥을 말했지만 일제에 의해 금서가 되고 말았다.
일제는 하나의 산줄기로 연결된 대간과 정맥의 개념을 없애고 산맥개념을 도입해
우리땅을 여러갈래로 갈라놓았다. 고토의 산맥도에는 아예 백두산이 없다.
일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를 식민통치에 편한 체제로 바꾸면서
우리의 지형을 바꿔 놓았다.
일본이 지배하여 역사와 정신을 모조리 훼절하면서 백두대간의 개념은
뒤안으로 사라지고 그들이 지은 이름인 마천령, 함경, 태백, 소백 등의
산맥 이름 만이 공식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4.산은 물을 넘지 않는다는 대원칙
조선후기의 실학자 신경준에 지어졌다고 추정되는
'산경표'에는 1대간, 1정간, 13정맥의 산줄기 이음이 있다.
13정맥은 청천강을 기준으로 한 청북정맥과 청남정맥, 한강을 에워싸는
한남, 한북정맥, 금강을 두른 금남과 금북, 낙동강
좌우의 낙동, 낙남 정맥, 임진강과 예성강 사이의 임진북 예성남 정맥,
그리고 해서정맥, 호남정맥, 한남 금북 정맥, 금남 호남 정맥등이다.
대부분의 산줄기 이름을 강에서 따온 이유는 노년기 산지의 애매한 줄기 이어짐을
역으로 물흐름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이는 대동 여지도의 발문에
'산줄기는 분수령을 따르게 마련' 이란 뜻의 '山自分水嶺 ' 명문화 하고 있는
줄기 가름의 대원칙 때문이다
5.백두대간은 1대간, 1정간, 13정맥
* 1 대 간 : 백두대간
(남한지역) : 한북정맥,한남정맥,금북정맥,한남금북정맥,금남정맥,
호남정맥,금남호남정맥,낙동정맥,낙남정맥
6.백두대간 종주
백두대간 부활에 첫 시위를 당긴 이들은 산악인들이었다. 처음엔 대학생들을 중심이었다.
뒤를 이어 일반 산악인들이 줄줄이 백두대간 종주의 장도에 올랐다.
백두대간 종주는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말한다.
여름철의 뙤약볕과 싸우며 걸어야 할 때도 있고, 하루 종일 물 한모금 마시지 못하고
며칠을 가도 사람 한 명 만나지 못할 때도 있고 길 아닌 길로 들어서 가시덩쿨에
그 모든 고통의 순간들이 너무도 또렷히 떠오르지만 언제나 말없이 그윽한 눈빛으로
또한 지구상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분단 국가로서 백두대간은 통일에 대한
7.백두대간 종주요령
백두대간 종주는 하루에 지도상으로 15㎞씩 걷는다 해도 40여일이 넘게 걸린다.
구간을 나눠서 주말에만 종주를 할 경우 일주일에 한번씩 꾸준히 나선다해도
백두대간 종주에는 지도가 필수적이다. 지도는 서울 종로의 중앙지도상사(02-730-9191),
지도는 5만분의1 지형도를 기본으로 까다로운 곳만 2만 5천분의1을 추가로
계곡으로 빠지지 않게, 지 능선으로 잘못 들지 않게 그어야 하며 연필 로 그린 다음
위험한 구간이 간간히 나타나지만 중급 이상의 실력자라면 어려움없이 통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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