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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 둘레길/서해랑길(진)

서해랑길43코스(사포버스정류장-상포마을회관-서정주생가-연기제-선운사버스정류장)

by 山頂 2025. 5. 12.

서해랑길43코스(사포버스정류장-상포마을회관-서정주생가-연기제-선운사버스정류장)

 

▣ 트래킹 일시 : 2025년05월10일. 토 . 날씨 : 흐리고 간간히 비

▣ 트래킹 참여 : 거인산악회 

 서해랑길43코스(사포버스정류장-서정주생가-선운사버스정류장)거리및 QR위치

    <주요지점및 거리> = 21.1km

    사포버스정류장-6.1km-상포마을회관-6.0km-서정주생가-7.4km-연기제-1.6km-선운사버스정류장

    <QR위치>

     - 시점 : 전북 고창군 흥덕면 사포리 469-3(사포버스정류장옆)

     - 종점 : 전북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400-1(선운산안내소옆)

서해랑길43코스(사포버스정류장-서정주생가-선운사버스정류장)통편

      거인산악회 전용버스/40,000원

서해랑길43코스(사포버스정류장-서정주생가-선운사버스정류장)트래킹 기록

    - 두루누비따라가기 : 24.15km/ 05시간16분(10:19~15:35)

    - 오록스맵 기록 : 21.87km / 05시간15분(10:19~15:35)

    - 서해랑길43코스(사포버스정류장-서정주생가-선운사버스정류장)록스맵 트랙

서해랑길43코스(사포리버스정류장~선운사버스정류장)산정__20250510_1019.gpx
0.27MB

 

서해랑길43코스(사포버스정류장-서정주생가-선운사버스정류장)지도

 

서해랑길43코스(사포버스정류장-상포마을-서정주생가-연기제-선운사버스정류장)메모

 

주말이면 트레킹을 하고 있는데...몇주째 계속 비 와 함께 하게 되네요

5월도 중순으로 접어드는 오늘도 비와 바람으로 기온이 차겁게 느껴집니다. 

서해랑길43코스도 사포버스정류장에서 역방향으로 진행하여 선운사 입구에서

마치게 되며 거리는 약21km정도 인데... 오늘 걷는 구간중에는 미당서정주 시인의

생가와 미당시문학관을 둘러볼수 있으며, 걷기가 끝나는 시점에서 조금만 발품을 팔면 

대한불교조계종 24교구 본사 도솔산 선운사를 탐방 할 수 있는 구간입니다.

낮이되면 비가 그칠거라는 예보는 어긋났고, 고창군 흥덕면 사포리 버스정류장앞에

도착하니 부슬 부슬 비가 내리네요... 그러나 우산은 안써도 될만큼...

10:19  약간씩 뿌리듯 하늘에서 내려오는 비...

그러나 비옷을 안입어도 될듯하네요. 사포리 버스정류장 옆에 있는 

서해랑길 부안44코스 시점앞에서 역방향으로 진행하여

 부안43코스 시점인 선운사 입구까지 걷기를 시작합니다.

사포마을 버스정류장앞 삼거리에서 2차선도로를 따라 좌측의 김소희 생가로 향합니다.

국악계의 사표(師表)이며 국창(國唱)으로 불리는 만정 김소희 생가앞에 닿습니다.

ㄱ자 형태의 초가지붕을 얹은 민가로, 온돌방 3칸과 부엌 1칸으로 구성되어 있고

황토와 지푸라기를 짓이겨 바람벽을 만들었고, 댓살로 문과 창문을 엮었다.

안방 문 위에 김소희 사진과 가족사진이 걸려 있다.

뒤뜰에 장독대와 우물이 남아 있으며 헛간도 한 채 있다.

김소희는 1917년에 출생 1929년에 광주의 송만갑 문하로 들어가 판소리 공부를 하였고

15세에는 제1회 전국춘향제전명창대회에서 장원을 하였다. 이후 정정렬, 박동실

정응민 등에게 사사하였고, 1964년에는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다.

김소희는 안향렬, 신영희, 이명희, 안숙선, 오정해 등의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으며,

미국, 유럽, 일본 등지에서 활동을 하면서 판소리를 세계화시키는 데에 공을 세웠다.

만정 김소희님 생가에서 박민주 선배님과

만정 김소희 생가앞에서 오늘 트레킹에 참석한 회원님들과 함께

만정 김소희 생가앞의 2차선도로(사포상암로)에 닿고

도로를 따라 '갈곡천'을 건너 갑니다.

우측 곰소만으로 흘러 가는 갈곡천 풍경

서해랑길은 갈곡천을 건넌후 우측으로 휘어져

갈곡천을 따라 걷게 됩니다.

우측으로 갈곡천이 흐르는 천변길을 따라 가면

고창군 부안면 수앙리의 배수펌프장이 있는 곳을 지나게 된다.

우측 곰소만과 연결되는 갈곡천에는 그물이 쳐져 있는 풍경도 보이네요

곰소만으로 흘러드는 갈곡천 옆쪽으로 만들어져 있는

새우 양식장으로 들어섭니다.

새우 양식장 지역을 지납니다.

김소희 생가에서 2.7km쯤 지나는 지점의 이정표...

우측으로 휘어져 미당 시문학관10.7km 방향으로 갑니다.

좌측으로는 고창군 부안면 수앙리 마을이 보이고

우측으로는 양식장이 길게 이어지는 길을 걷습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양식장을 따라 상포 마을로 향합니다.

우측으로 보이는 양식장 풍경

앞쪽으로 고창군 부안면 상암리의 상포마을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상암리 상포마을앞에서 좌측으로 휘어져 가고

11:31   상암리의 상포 마을회관앞에 닿습니다.

고창군 부암면 상암리는 조선 말기 흥덕군 부안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석암·원당(元堂)·상포·반월(半月)

인촌(仁村) 일부를 병합하여 상암리라 하고 부안면에 편입하였고

상포(象浦)의 ‘상’자와 석암(石岩)의 ‘암’자를 따서 상암(象岩)이라 하였다네요...

고창군 부안면 상암리에 있는 자연마을로는 

신농원, 석암, 농원, 반월, 상포, 원당, 주섬 마을이 있고

상포(象浦)마을은 마을의 지형이 코끼리 모형과 같다 하여 '상'자를 넣고

포구란 '포'자를 따서 상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상암리 상포마을회관앞을 지난후 상포길을따라 상포마을을 벗어 납니다.

상포길을 따라 양식장이 있는 곳을 지납니다.

상포마을에서 반월마을로 향합니다.

상포길을 따라 반월마을로 가는 풍경

반월마을로 가는길 우측편으로는 곰소만이 있고

곰소만 건너편으로는 곰소항 일원이 손에 잡힐듯 보입니다.

곰소만은 서해안의 전북 부안군과 고창군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만으로써

만의 대부분에 갯벌이 잘 발달되어 있으며, 서해안의 만 가운데 원지형의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과거에는 대표 어항인 줄포의 이름을 따서

줄포만으로 불리기도 하였으나, 현재는 곰소가 가장 큰 어항이자

경제 활동의 중심이다. 곰소라는 지명은 과거에 소금을 곰소라고 부른데서

유래한다는 설과 곰소 일대 해안의 형태가 곰처럼 생겼고 작은 소(沼)가

존재한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전해집니다.

부안군 변산과 고창군 부안면 사이의 곰소만에 있는 죽도도 보이네요 

전북 부안군 진서면 과 고창군 부안면 사이의 곰소만에 있는 작은섬인

죽도는 행정구역상으로 고창군 부암면 봉암리의 섬으로, 지명과 관련해

섬에 대나무(竹)가 무성하여 지명이 유래하였다는 설과 섬이 크게 보인다고

  대(大)섬이라고 부근것이 한자화하며 대 죽(竹)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네요.

상포마을에서 반월마을로 가는 길에 곰소만을 지나며

김소희 생가에서 7km진행한 지점에서 만나는 이정표에서

좌측으로 휘어져 미당시문학관1km 방향으로 갑니다.

좌측으로 휘어져 태양열 발전단지가 있는 아래쪽의 농로를  따라 진행합니다.

논가운데의 농로를 따라 언덕을 올라 반월마을로 향합니다.

반월마을로 진입하는 언덕에서 만나는 드 넓은 밀밭....

일하는 주인아주머니의 허락을 받아 사진을 찍고 갑니다.

밀밭에서

일하고 계시는 농장주인듯...

밀밭을 벗어나 반월마을로 향합니다.

반월마을 풍경

전북 고창군 부안면 상암리에 속하는 반월(半月)마을은

마을의 지형이 반달 모형이라고 하여 반월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반월마을로 들어서 화목교회앞을 지나고...

좌측에는 농막과 민가들이 있고, 우측에 양식장이 있는 길을 따라 화목마을을 벗어 납니다.

상암리 반월마을을 벗어나면 행정구역은 고창군 부안면 봉암리로 접어 듭니다.

봉암리는 조선 말기 흥덕군 부안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봉오(鳳梧)·인촌(仁村)·대고(大姑) 각 일부

 이서면 죽도(竹島)를 병합하여 봉암리라 하고 부안면에 편입하였으며...

봉암리는 인촌리·봉오리·죽도리 3개 행정리와 인촌(임촌)·할미당(고당)

죽도·봉오 등의 자연 마을이 있고, 문화유적으로 인촌선생의 생가가 있습니다.

넓은 '인촌로'에 있는 2개의 이정표에서

좌측 이정표의 신기마을 0.8km방향으로 휘어져

농로를 따라 걷습니다.

농로를 따라 신기 마을로 향합니다.

계속해서 벌판길을 따라 갑니다.

가로지르는 비포장 도로를 건너서 다시 농로 가운데를 지납니다.

곧게 뻗은 농로 끝의 수로가 있는 곳까지 걷게 됩니다.

직진의 농로 좌측으로는 소요산이, 우측으로는 선운산이

구름속에 몸을 숨기고 있네요

농로를 지나며 좌측으로 바라본 소요산 풍경

소요산 아래쪽에 미당 서정주의 생가가 있는 곳입니다.

직진의 농로끝 삼거리에 닿습니다.

좌측으로 휘어져 수로를 따라 걷습니다.

우측에 수로를 끼고 미당 서정주님의 생가로 향합니다.

수로를 건너 직진의 도로를 따라 미당 서정주 생가가 있는 곳으로 향합니다.

수로를 건너면 부안면 선운리에 들어서게 되고

직진의 도로를 따라 잠시 걸으면

인촌로 사거리의 미당 시문학 마을에 닿게 됩니다.

2차선도로(인촌로)를 건너 서정주 생가로 향합니다.

길을 건너면 좌측에 시문학 체험관이 보이고

시문학 체험관 옆에는 선운리 회관이 보입니다.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는 마을 앞에 포구가 있어서 선운포(仙雲浦)라고

명명한 것에서 기원하였다고 한다. 조선 말기 흥덕군 이서면과 부안면에 속했으며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부안면의 구룡리, 신흥리 일부

이서면 선운리를 병합하여 선운리라 하고 고창군 부안면에 편입하였다.

구룡동 동쪽에 귀영다래, 독내들 밑에 남생이 모양의 남생잇골, 서당물(서당리)

남쪽에 법고낭골 등의 골짜기가 있고, 서당물에서 부안면 검산리 쇠점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질마재(안현/鞍峴)가 있다. 모양이 길마처럼 생겨 붙인 이름이고

서당물 앞의 지형이 구유처럼 생긴 구숫들, 서당물 동남쪽에 독네들 등의 들이

펼쳐져 있다. 서당물 남서쪽에 더운바우, 더운바우 위에 노적가리 모양의 노적바우

노적바우 위에 산기슭에 툭 불거져 솟은 불근바우가 있다.

선운리 앞 바닷가에 선운포 터가 있고 선운리 출신인

 미당 서정주의 생가와 그를 기념하는 미당시문학관이 있습니다.

미당 서정주 생가

미당은 1915년 음력5월18일 이곳에서 태어났고

1942년 부친 서광한이 별세한 후, 친척이 거주,관리 하면서

지붕을 스레트로 개조하였다.  1970년경부터 사람이 살지 않은채

방치 되었다가 2001년8월 옛 모습대로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서정주 생가에 있는 '국화와 산돌' 시비

미당 서정주 생가에서

미당 서정주님의 생가 벽에 붙어 있는 시 동천(冬天)

미당 시문학관앞에 도착했습니다.

미당 시문학관 입구

미당 시문학관 안으로 들어서면 미당의 생애에 대한 요약한 연표가 보입니다.

서정주의 본관은 달성(達城), 호는 미당(未堂)이다. 1915년 5월 18일 전북 고창에서 태어났고

고향의 서당에서 공부한 후,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6년 중앙불교전문학교를 중퇴하였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벽〉으로 등단하여 같은 해 김광균(金光均)·김달진(金達鎭)·

김동인(金東仁) 등과 동인지 시인부락(詩人部落)을 창간하고 주간을 지냈다.

1941년 화사(花蛇), 자화상(自畵像), 문둥이등 24편의 시를 묶어 첫시집《화사집》을 출간했다.

그러나 1942년 7월 매일신보에 다츠시로 시즈오(達城靜雄)라는 이름으로

평론 시의 이야기(주로 국민 시가에 대하여)를 발표하면서 친일 작품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후 1944년까지 친일 문학지인 국민문학과 국민시가의 편집에 관여하면서 

수필 '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 인보(隣保)의 정신, 스무 살 된 벗에게 와 

일본어로 쓴 시 '항공일에', 단편소설 최제부의 군속 지망, 시 헌시(獻詩), 오장 마쓰이 송가

따위의 친일 작품들을 발표했다.

1948년에는 시집 《귀촉도》, 1955년에는 《서정주 시선》을 출간해 자기 성찰과

달관의 세계를 동양적이고 민족적인 정조로 노래하였고, 이후 불교 사상에 입각해

인간구원을 시도한 '신라초', '동천, 토속적·주술적이며 원시적 샤머니즘을 노래한 '질마재 신화'와

'떠돌이의 시', 외에 '노래', '팔할이 바람', '산시(山詩)', '늙은 떠돌이의 시' 등을 출간하였다.

1948년  동아일보의 사회부장·문화부장, 문교부 예술국장을 거쳐 1954년 대한민국예술 회원이 되었다.

이후 조선대학교·서라벌예술대학교 교수, 동국대학교 문리대학 교수(1959~1979)를 지낸 뒤

동국대학교 대학원 종신 명예교수가 되었다. 1971년 현대시인협회 회장, 1972년 불교문학가협회 회장

1977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1984년 범세계 한국예술인회의 이사장, 1986년 '문학정신' 발행인 겸

편집인을 지냈고, 2000년 12월 24일 사망하였다.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시문학관에 설치되어 잇는 화사집 소개

시 제목이 재미 있네요

5층으로 이루어진 미당 시문학관을 둘러 보고 선운리를 벗어납니다.

우물이 있는 곳을 지나고...

선운리의 '진미안길'에서 '서당물길'로 들어섭니다.

두그루 거목의 느티나무와 정자가 있는 곳을 지나고

선운리를 벗어나 채석장 아래쪽에 있는 '선운제'로 향합니다.

2차선 차도(질마재로)를 따라 우측으로 진행하면 '선운제'에 닿습니다.

'질마재로' 좌측에 보이는 '선운제' 풍경

서해랑길은 '선운제' 끝 지점즈음에서 '질마재로' 우측의 민가쪽으로 갑니다.

선운리의 마지막 민가를 지나면 산길로 들어서 '질마재'로 향하게 됩니다.

계곡을 건너는 작은 목교를 2번이나 지나고

가파르게 오르는 산길을 올라 '질마재'로 향합니다.

질마재 고갯마루턱에서 '질마재길 제3코스 안내판'을 지납니다.

13:56   소금짐 지고 쉬어 쉬어 넘던 고갯마루 '질마재'에 도착하고

이정표가 있는 방향(우측)의 임도를 따라 진행을 합니다.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소요산 자락에 있는 진미마을 뒤에 있는 질마재는

짐을 실으려고 소나 말의 등에 안장처럼 얹는 기구인  길마 처럼  닮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길마’의 사투리인 '질마재'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미당 서정주 시인이 유년기에 고향 사람들과 겪었던 풍속을 산문 양식으로 담은

여섯 번째 시집 『질마재 신화』의 주요 무대였다. 시인은 전통적인 ‘이야기꾼’으로

변모하여 촌락 사회의 일상에서 우리 고유의 전통을 발굴하고, 질펀한 토속어로

흥미진진한 일상의 삶을 신화적 단계로 끌어올리는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고 하네요

질마재에서 우측으로 휘어진 서해랑길은 소요산 자락의

허리쯤의 능선을 따라 조금씩 고도를 올리며 갑니다.

그렇게 오르던 산길에서 아래로 보이는 포장도로를 향해 내려가고

세멘트포장 임도 삼거리에 도착합니다.

이정표에 선운사 7.5km표시가 되어 있네요

세멘트포장 임도 삼거리에 있는 사각정자를 지나 우측으로 휘어져 갑니다.

임도삼거리의 사각정자에서 우측으로 휘어지면 넓은 비포장 임도를 따라 내려갑니다.

다시 포장 임도 지역을 내려가고

'연기제'의 물이 보이는 곳을 지나고

연기제 둑을 따라 저수지를 횡단합니다.

연기제 둑 좌측으로는 고창 용산리 분청사기 요지가 보이네요 

'연기제' 풍경

14:57       '연기제' 표지석에 닿습니다.

연지제에서

탐스럽게핀 하얀 이팝나무 꽃이 피어 있는 연기길을 따라 고창군 부안면 '용산리'로 향합니다.

연기제 저수지 둑위에서 내려다 보았던

용산리 연기분청사기도요지 입구를 지나고

용산리 고인돌 나 - 1 앞을 지납니다.

고창군 부안면 용산리의 연기마을 홍보 안내판이 있는 곳을 지납니다.

용산리 연기마을 지도

이팝나무꽃이 활짝 피어 있는 가로수 길을 따라 용산리 연기마을을 지납니다.

고창군 부안면 용산리는 풍수지리상 마을 주위 산세가 용의 형국으로 용산(龍山)이라

 하였고 자연마을로 연기리, 용흥리, 굴치, 바우배기,용머리등이 있으며

용산 서남쪽에 산세가 닭이 우는 형국인 계명산(鷄鳴山), 용산 뒤쪽에 건기봉(建祺峰)

일명 건지봉, 노적봉이 솟아 있다.  연기마을은 용산 서쪽에 있는 마을로

예전 연기사(烟起寺)가 있어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용산리 연기마을 끝에서 주진천위에 놓인 연기교를 건넙니다.

주진천(舟津川) 풍경

주진천은 전북 고창군 고수면 은사리 수량동 명매기골에 있는 명배기샘에서

발원하여 고창군 심원면 용기리 서해안으로 흘러드는 하천으로 원래 주진천은 

인천강(仁川江)으로 기록되어 전해져 왔다. 일제 강점기인 1911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배가 드나들었던 곳이라는 의미의 ‘배날’이에서 한자화된

주진(舟津)으로 지명이 바뀌었다. 그에 따라 인천강의 이름도 주진천으로 바뀌었고

현재는 주진천이라는 명칭으로 각 행정 기관이나 사전 등에서 쓰이고 있으며

주진천(인천강)의 유역 면적은 229.3㎢이고, 유로 연장은 29.3㎞라고 합니다. 

서해랑길은 연기교를 건너면 행정구역이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로 바뀌고

삼인교차로에서 직진의 선운사 방향으로 진행합니다.

선운사로 가는 '선운사로'변에는 풍천 장어 음식점들이

줄지어 서있고 우측편에는 선운천이 흐릅니다.

'선운사로'를 따라 '선운교'를 건너고

선운산도립공원 입구에 닿습니다.

선운산도립공원 입구 우측으로는 넓은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고

서해랑길은 좌측의 예쁜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는 산책로를 따라 갑니다.

예쁜사진을 찍을수 있도록 만들어진 포토존이 보이네요

예쁜 조형물들이 설치되어 있는 공원길을 지나고

선운산도립공원 입구의 산책로 풍경

  선운산 도립공원 조형물을 지납니다.

15:35   선운산버스정류장을 지나면 서해랑길 고창43코스 안내판을 만나고

이곳에서 부안면 사포리버스정류장앞에서 역방향으로 출발한 트레킹을 마칩니다.

서해랑길 43코스 걷기를 마치며...

♥♥♥

서해랑길43코스 걷기를 마치고 서울로 귀경하려면

약1시간 30분 여유가 있어 선운사 탐방을 합니다.

선운산도립공원 관리사무소 뒤쪽 선운천변에 자리하고 있는

1991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송악'을 구경합니다.

송악은 선운사로 들어가는 길가의 선운천 절벽에 붙어서 자라고 있는데

길이가 15m 정도로 퍼졌으며, 가슴높이둘레가 80cm 정도인 노거수이며

송악은 상춘등(常春藤) · 토고등(土鼓藤) 또는 용린(龍鱗)이라고도 하는

상록덩굴식물 입니다.

송악은 동쪽으로는 울릉도, 서쪽으로는 인천 앞바다까지 성장이

가능하고 내륙지방에서는 김제시 금구면이 북방한계선이었는데

금구면에서 자라던 것이 죽었으므로 이곳 삼인리에서 자라는 송악이

육지에서는 가장 북쪽에서 자라는 것이 되었다고 합니다.

송악은 두릅나무과에 속하며 줄기에서 돋는 기근(氣根:땅 속에 있지

않고 공기 중에 있는 뿌리)으로 다른 물체에 붙어 살아가는 식물이라

관상자원의 하나로서 많은 품종이 개발되어 있다고도 합니다.

송악을 보고 산책로를 따라 선운사로 향합니다.

도솔산 선운사 일주문앞에 닿습니다.

일주문을 들어서기전 앞쪽에는 선운사 구역도가 있으며

선운산을 배경으로 드라마와 영화촬영을 했던

작품을 소개한 홍보판도 보이네요

일주문을 들어서 잠시 걸으면 삼거리에 닿고

좌측으로는 도솔암으로 가게되는 도솔교가 보이고

선운사는 연등이 달려 있는 직진의 도로를 따라 갑니다.

선운사의 천왕문에 닿기전에 우측으로 

선운사 백파율사비를 먼저 둘러 봅니다.

나즈막한 돌담 울타리안에 조성된

선운사 백파율사비가 우측에 보이네요

선운사 백파율사비는 조선시대 스님이 백파율산 긍선(1767~1852)을

기리려고 1858년에 세운 비석으로,  비석에 직접 글을 짓고 글씨를 쓴 사람은

백파율사와 어울린 명필가이며 학자인 추사 김정희라고 합니다.

백파율사 긍선은 고창 무장 출신으로,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대원군의

10대손으로 12세에 선운사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조선 후기 

수선결사로 불교를 중흥하려던 화엄종의 대가이다.

백파율사비는 사진의 좌측 자그마한 오석의 갓씌운 비석입니다.

백파가 60세때 선종 종파들의 특징을 자신의 논리로 밝힌 '선문수경'을 짓자

해남 대흥사의 초의선사와 그와 친밀하고 불교에도 박식했던 추사는 편지로 

백파와 논쟁하였다. 특히 1843년에 추사는 '백파망증 15조'에서 15가지를 근거로

백파의 논지가 잘못되었다며 신랄한 표현으로 백파와 그제자들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이후 이들의 제자들이 서로 이어가며 100여년 동안 논쟁하였다.

백파가 입적한지 3년뒤인 1855년 그제자들의 부탁에 추사는 비문을 써 주었다.

비문은 백파가 입적한 순창 영구산 구암사에 보관되어 오다가 3년후인

1858년에 백파가 출가한 선운사로 보내져 지금의 백파율사비가 세워졌다고 한다.

비의 규모는 전체 높이 2.36m, 몸돌 높이는 1.4m인데 야외에 있어 비가 훼손되는

것을 막고자 2006년에 선운사 성보박물관으로 이전하였다가 현재는 이곳에 있습니다.

백파율사비를 친견하고 선운사 천왕문앞의 극락교에 닿습니다.

극락교를 건너와 천왕문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가람이 배치 되어 있네요.

일주문을 지나면  지나면 다음에 통과해야 하는 것이 천왕문이다.

이 문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들이 모셔져 있다.

부릅뜬 눈과 크게 벌린 입, 발 밑에 마귀가 신음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

보는 이들을 두렵게 만드는데, 신성한 사찰에 무시무시한 사천왕을 모신 것은

악귀의 범접을 막기 위해서이고, 또한 절을 찾아온 중생들의 마음속에 있는

잡념을 없애주는 역할도 한다고 합니다..

천왕문앞에 있는 선운사 종합안내판

천왕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사물이 있는 범종각이 있다.

이곳은 법당의 네 가지 주요 물품인

범종·운판·목어·홍고 등을 비치하고 있으며

이곳 범종은 원래 천왕문 2층에 있었던 조선 후기 동종으로

높이 103cm, 입지름93cm이고, 용뉴(종을매다는 고리)를

포함한 전체 높이는 129cm정도라고 합니다.

범종각옆의 소원나무앞에 매달린 소원등이 예쁘네요

선운사(禪雲寺)는 전북 고창군 아산면 도솔산(兜率山)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본사로 백제의 승려 검단이 창건 했다고 전해진다.

  후백제의 견훤이 선불장을 열었으며, 1472년부터 10여 년 동안 극유가 크게

중창하였다. 정유재란으로 어실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으며

 1608년부터 10여 년 동안 중창이 이어졌다. 이후 중건과 중수가 이어져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보물로 지정된 3건의 지장보살상 외에도

다수의 지정문화재(현, 지정문화유산)가 있다. 법당앞쪽에 공사중으로

선운사의 대웅보전과 6층석탑 사진 찍기가 불편했습니다. 

선운사 대웅전은 정면 5칸의 맞배기와집으로 조선 중기 이후의 양식을

간직하고 있으며,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선운사 대웅전 앞 오른쪽에 있는 6층석탑

화강암으로 만든 고려시대 석탑으로 원래는 9층이었으나 

현재는 6층(높이6.2m)만이 남아 있으며

1973년 6월 23일 전북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기단 위에 윗부분이 둥근 정사각형의 하대석을 올려 놓고

그 위에 사각형의 중석(中石)을 세웠다.

중석의 우주(隅柱:모서리의 기둥)는 평평한 돌 2개를 앞뒤에 세웠다.

 조각 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 전기 또는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선운사 사적기에(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에 따르면

1472년(성종 3) 승려 행조가 재건하였다고 하네요.

대웅보전 좌측편에 설치되어 있는 연등 풍경

대웅보전 뒤에 자리하고 있는 선운사 동백나무숲은 대웅전 뒤를

3000여그루의 동백나무가 병풍처럼 둘러 싸고 있으며

1967년 2월 17일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고 선운사에서 소유하고

고창군에서 관리하고 있다. 선운사로 가는 길 오른쪽 경사면 아래

사찰 경계가 시작되는 동백호텔 뒤부터 선운사 뒤까지 폭 30m 정도로

이어지며, 면적 1만 6,529㎡, 평균 높이 6m, 수관 지름 8m 정도이고

큰 것은 밑부분 지름이 80cm이고 가슴높이 줄기의 지름이 30cm 정도이다.

선운사 동백은 3월말부터 피기 시작하여 4월중순에 절정을 이룬다고 하네요.

선운사 팔상전과 산신각

산신각은 사찰에 산신을 봉안하는 전각입니다.

산신각은 한국 사찰 특유의 전각 가운데 하나로서 한국불교의 토착화 과정을

일러주는 좋은 증거가 된다. 산신은 원래 불교와 관계가 없는 토착신이나,

불교의 재래신앙에 대한 수용력에 의하여 먼저 호법신중(護法神衆)이 되었다가

 후대에 원래의 성격을 불교 안에서 되찾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팔상전은 부처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그린 팔상도를 모신 사찰 전각이다.

석가모니의 일생을 여덟 가지로 간추리는 데는 여러 의견이 있으나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녹야전법상(鹿野轉法相),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의 여덟가지라고 하며

우리나라의 팔상전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속리산 법주사의 팔상전이라고 합니다.

조사전은 선종사찰에서 그 종파를 연 조사(祖師)를 봉안한 절집으로

조사당이라고도 하며, 조사전이 없는 절에서는 영각(影閣)을 짓고

 국사를 배출한 절에서는 국사전(國師殿)을 짓기도 한다.

고려시대 16국사를 배출한 송광사가 국사전을 짓고 16국사의

영정을 모시는 것이 그 예 라고 합니다.

명부전(冥府殿)은 사찰에서 저승의 유명계를 상징하는 불교건축물로

법당안에는 유명계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을 봉안하고 있으므로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하며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주불(主佛)로 봉안하고 있으므로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한다.

영산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갈라보살(竭羅菩薩)

미륵보살을 모신 사찰의 건물로 후불탱화로는 석가모니불이 영취산(靈鷲山)에서

설법하던 때의 모임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가 걸려 있다.

이곳에 참배함으로써 사바세계(娑婆世界)의 불국토인 영산회상에 참배하는 것이 된답니다.

관음전은 사찰에서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신 불전이다.

관음전에는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삼존불(阿彌陀三尊佛)

즉 중앙의 아미타불과 좌우의 관세음보살·대세지보살을 모신다.

관음전이 그 사찰의 주불전(主佛殿)일 때에는 관음전이라 하지 않고

원통전(圓通殿)이라고 부릅니다.

보물 금동지장보살좌상이 있는 선운사 지장보전 

전북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의 선운사 지장전에 봉안되어 있는

금동지장보살좌상은 청동 표면에 금칠을 한 지장보살상이다.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원하고자 지옥에 몸소

들어가 죄지은 중생들을 교화 구제하는 지옥서계의 부처를 말한다.

이곳 금동지장보살좌상은 도솔암의 금동지장보살좌상과 동일한 형태로

만들어 졌으며 머리에는 두건과 비슷한 관을 쓰고 있고 사각형의 통통한

 얼굴과 짧은 목, 형식적인 옷무늬로 표현된 조선초기 양식의 불상으로
넓적하고 살찐 얼굴에는 눈, 코, 입이 작게 묘사되었고 굵게 주름진

삼도(三道)가 있는 목은 짧아서 움츠러 든 모습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밀반출 되었다가 2년 후인 1938년 선운사에 되돌아왔다고 전해지며 

 불상의 높이는 1m 정도이며 청동 표면에 도금을 한 동조도금 형태입니다. 

돌솔산 선운사를 참배하고 되돌아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주차장으로 향합니다. 

선운산도립공원 입구로 나오는 길에 만나는 '선운산가비'

고인돌 위에다 돌탑을 쌓아놓은 곳을 지나고

선운산도립공원 관리사무소앞에서 모든 일정을 마칩니다.